1947년 3월 몽양의 집(해방 전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들이 모였던 집)이 테러로 폭파됐다. 3월 17일 밤, 계동의 집 담을 넘어 몽양의 침실 난로에 시한폭탄을 넣고 탈출한 사람이 있었다. 폭발 당시 가구가 모두 뒤집어지고 집 두 채가 무너졌습니다. 다행히 몽양은 다른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 사진 몽양여운형기념회
해방 후 친일파를 배척하고 외세를 견제하여 민족통일과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하려던 몽양씨를 비방한 미군정당국은 그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사회적으로 고립시켰으며, 심지어 그의 성격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음모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귀국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테러를 택했다. 몽양씨가 해방 후 2년도 채 안 되어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 수십 차례 크고 작은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어느 날 장권은 테러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몽양을 찾아와 큰 눈물을 흘렸다. “주먹으로 바닥을 쳤어요.” 나 화나. 쥐나 다름없는 이 반역자들이 어찌하여 또다시 이 땅의 주인인 척 하는 걸까요? “그럼 왜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없었나요?” 맹양 역시 분명한 후회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지금 막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해방 이후 애국민주세력이 뭉쳤더라면 반역자들을 제거한 사람은 한 줌도 안 됐을 텐데… “저에게도 책임이 큽니다.” 돌이켜보면 해방부터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기까지 한 달 남짓의 시간이 있었다. 이때 상황은 확실히 애국민주주의적 역량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우리 인민이 자기 손으로 일제식민지통치기관을 무너뜨리고 각급 인민위원회를 꾸려놓은 우리 인민의 기상과 열정은 얼마나 높았으며 그들의 희망과 포부는 얼마나 컸습니까. 만약 당시 한국의 애국민주적 역량이 합쳐져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했다면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국민의 염원대로 통일된 독립국가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만, 우리는 해방 직후 남조선에 수십 개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가 나섰으나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스스로를 ‘장안파’, ‘재건파’라 칭하는 공산당은 종파싸움과 세력확대에 몰두했고, 중간정당들도 서로의 주장을 두고 몸싸움을 벌였다. 결국 민주권력은 분열되고 국민은 정치적 혼란 속에 길을 잃었다. 이때 미군은 남조선에 주둔하여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품에 안아 그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야망을 실현하였다. 입력했습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은 몽양에게 참으로 뼈아픈 교훈을 주었다. 이는 당시 몽양이 장권과 그의 딸 여연경에게 들려준 이야기로 잘 설명된다.